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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 글 사람도 고프다 |
언젠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얼마전 비가 내리던 날 밤에 슬픔을 꺼내보았다. 그날은 참 많지도 적지도 않은 비가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모를 빗소리를 내면서 힘없이 내리고 있었다. 창문가에 서서 멍하니 가로등 사이로 보이는 빗방울의 궤적을 쫒고 있다가 문득 슬픔을 꺼내보고 싶어졌다. 그 순간 다른 감정이 있었다면 아마 그것을 꺼내보고 싶었겠지만 그 당시에 내 속에서 스며 나오는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이었다. 나는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한참동안 보면서 스며나오는 슬픔을 모았다. 그냥 어디론가 흘러 없어지는 것들을 모아보겠다고 생각하니 손에 잡힐 만큼 모으려면 꽤나 오래 걸리 겠구나라는 예상과는 달리 순식간에 덩어리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하늘을 보고 고개를 떨구거나, 전화기를 쓸 데 없이 여닫으며 움직이면 더 많은 슬픔이 스며나왔다. 긴 한숨이라도 쉬면 울컥하며 덩어리진 슬픔이 쓸려나왔다. 그렇게 나에게서 쥐어짜내어진 슬픔은 두 손을 가득채우고도 넘치도록 모였다.
손가락끝이 '아리도록' 시린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슬픔.
'몸서리 처지게' 차가운 슬픔을 손위에 이리저리 옮겨가며 쥐고 있었다. 손끝으로 '뭉클'뭉클한 느낌과 함께 냉기 때문인지 '따끔'한 느낌이 손 전체로 느껴졌다. 이 가시도 없는 덩어리가 가시처럼 찌르는건 이 냉기들 때문이었나보다. '고통'을 참으면서 조금 더 만져보니 안에서 단단한 덩어리들이 느껴졌다. 덩어리를 만져보기위해 손끝을 세워 더듬고 있자니 손끝으로 전해오는 아린 고통에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가끔 이 덩어리들이 가슴을 막는거구나, 그래서 답답한거구나. 어렵게 뭉쳐진 덩어리를 꺼내 짓뭉게 보니 속에는 작은 종이쪽지가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쪽지주변으로 슬픔들이 엉겨 덩어리를 만든 것 이었다.
'날 좋아하면 안돼요.'
'나 말고 더 좋은 사람만나 아직 시간 많잖아.'
'미안해 당신에겐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이렇게 힘들게 좋아해보긴 처음이네요.'
'제가 좋아할수록 당신이 힘들어지는게 보여요.'
'넌 좀 다른 줄 알았는데.'
'만나볼까 고민도 되요.'
'죄송해요. 좋아해서.'
'당신 정말 매력있다니까.'
'미안한게 뭐있어요. 미안하다 하지말고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하세요.
그렇게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아프게 하는 나쁜사람되잖아.'
'안녕, 잘자'
'우린 이제 친구도 될 수 없어.'
'신경쓰지 마세요.'
'내가 사람보는 눈이 없었던거지.'
'사는건 후회만 남기는 건 가봐요.'
'당신을 잃고 싶지는 않아요.'
꺼내든 쪽지들에 적혀진 문장들. 내가 그녀에게, 그녀가 나에게 했던 무수한 말들이 적혀있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말들도, 내가 힘들게 만들었던 말들도, 나에게 기쁨이 되었던 말들도 슬픔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우습게도 오히려 기쁨이 되었던 말들이 더 큰 덩어리로 뭉쳐있었다. 가만히 쪽지들을 읽고 있는 사이 두손가득 담겼던 슬픔들은 한 웅큼으로 줄어들었고, 조금씩 작아지다 이내 쪽지들만 남기고 사라졌다. 손을 타고 올라온 냉기는 '코끝이 빨갛게' 되도록 전해져 왔고 나는 손을 입에 가져가 '한 숨' 쉬 듯 입김을 불어 손을 녹였다. 입김을 불다보니 '어지러움' 과 함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냉기에 얼었던 코끝의 '찡한느낌' 에 인상을 찡그리니 흐르다만 '눈물'이 살짝 배어 나왔다.
눈을 들어 창밖을 보니 비는 그쳐 있었고 물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내가 선 자리는 흥건히 젖어 있었고, 갈 곳 없는 슬픔이 다시 차올랐다.